어렸을 적에 나는 깍두기였다. 어두운 생활을 하는 형님들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쪽에도 끼지 못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서너 살 위의 형들과 어울리다 보니 편가르기를 할 때면 늘 그 신세를 면하지 못하였다. 그래도 요즈음의 시쳇말로 왕따는 아니었으니 나름 행복하기도 하였던 것 같다. 오히려 이편저편 가리지 않고 어울릴 수 있었으니 말이다. 그때는 이기고 지는 것도 그냥 재미를 더하기 위해서 마련된 방편일 뿐이었으므로 팀의 구멍이었던 나의 실수에도 모두가 웃어넘기며 즐거워하기도 했다. 내치지 않고 늘 함께 해주었던 그런 형들을 나는 참 좋아했었다.

자라면서 아주 잠시, 깍두기 생활을 접고 편가르기 속으로 깊숙하게 빠져들었던 때도 있었다. 그때는 세상의 중심이 나와 우리편에만 있어야 했고 그것이 정의라고 믿었다. 다른 편은 불의이고 타도의 대상일 뿐이며 깍두기는 상종 못 할 비겁한 회색인일 뿐이었다. 치우친 생각으로 머리의 한쪽만 커지고 그곳에 모든 행동이 갇혀버렸었다. 나아갈 방향도 모르면서 갈라치고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하였으니 지금에 와서 다시 생각해보면 아찔하기만 하다. 하긴 모든 역사가 '편가르기, 갈라치기'의 기록이기는 하지만. 이른바 갈라치기를 하다가 실패하면 역적이요 성공하면 영웅이라던가.

자치통감을 쓴 사마광은 지도자가 갖춰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을 다음과 같이 제시했다고 한다. "재주와 덕을 두루 갖추면 성인이지만 둘 다 모자라면 우매한 자라 합니다. 덕이 재주보다 나은 자는 군자고 재주가 덕을 넘어서는 자는 소인입니다. 만일 성인과 군자를 얻지 못한다고 하여 소인과 함께한다면 이는 우매한 자를 얻는 것만 못합니다. 왜 그러합니까? 소인은 재주가 좋아서 한번 악한 일을 하기 시작하면 사람들에게 큰 피해를 주는 반면, 우매한 자는 재주가 변변찮아 악한 일을 하려 해도 일을 이룰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재(才)가 덕(德)을 넘어서는 소인을 경계하라는 진언이다. 어차피 정치란 권력을 쟁취하고 유지하려는 행위에 지나지 않는데 무엇을 더 바랄까?

재주와 덕, 둘 다 모자란 나는 두루치기라는 말을 좋아한다. 철냄비에 여러 가지 재료를 넣어 익혀서 먹는 음식 두루치기도 좋고, 한 사람이 여러 분야에 걸쳐 잘하고 능숙한 팔방미인이라는 뜻의 두루치기도 좋다. 김치찌개가 졸아들어도, 김치볶음에 물이 생겨도 두루치기라고 우겨도 되니 더 좋다. 영양소니 칼로리니 하는 그런 것 나는 모른다. 한 끼 입맛 다시며 우리 같이 둘러앉아 넉넉하게 먹으면 그뿐이다. 한 분야만 갈라쳐서 파고드는 것도 좋지만 두루두루 잘하는 넉넉함이 더 좋다. 쪼개고 쪼개고도 더 쪼갤 수는 없을까 노심초사하는 재주있는 사람도 좋기는 하지만 사물의 궁극적인 이치를 깨닫고 자연스럽게 살아가는 덕망 있는 사람이 더 좋다. 맛과 멋은 아무래도 갈라치기 보다는 두루치기에 있는 듯하다.

간혹 일의 정황을 정확히 파악하거나 이해하지도 못한 채 기본과 원칙을 무시하고 막무가내식으로 밀어부치는 무뢰한들도 없지는 않다. 그럴 때마다 어린아이 재롱을 보다가 터져나오는 것 같은 웃음을 참을 수 없다. 이곳저곳 할 것 없이 두루 섭렵한 깍두기 생활에 이골이 난 사람들의 눈에는 왜 그렇게 무리수를 두어야만 하는지 다 보이게 마련이다. 다 들여다보인다는 줄 알면서도 왜 그러는 걸까?

서로를 아끼고 남의 말에 귀 기울이며 잘못이 있으면 바로잡을 줄 아는 강인한 마음을 지니고 있는 사람에게는 맞서 싸우지 않을 배짱이 있는 법이다. 그것이 용기다. 위엄은 그곳에서 나온다. 그러나 약한 마음은 자만과 폭력을 낳는다. 검을 뽑는 것, 그것은 곧 죽음을 의미한다.

"스스로 비우고 덜어내면서 스스로 이겨내지 못하면 버려진다."라는 사실과 "내가 같이할 팀을 내가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팀이 나를 선택했을 때가 더 오래 간다."라는 것을 깍두기가 되어 본 사람은 알고 있다. 여러 관계사이의 화음을 포착하는 그림이 되거나 으뜸음과 화합하는 음악이 되어 어울리다 보면 드디어는 하나가 된다는 것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리라. 그래서 사람을 알아주는 것을 두고 지음(知音)이라고 하는 지도 모른다.

요즘 세상이 더욱 어수선해졌다. 몸도 마음도 갇혀있는 듯 하고 알량하게 가진 것 빼앗기고 있는 듯도 하고 믿었던 사람들에게 배신당한 것 같은 느낌도 들고 깍두기라도 되어 끼어들고 싶은데 왕따가 되는 것 같기도 하고….

아무리 그렇더라도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의 그림자라고 했으니 현재의 인연에 충실하다 보면 맑고 밝은 아름다운 큰 세상을 만나게 될 것으로 믿어 보련다. 내가 바보가 된 것인가?

작은 힘이나마 보탤 수 있는 다소 모자라는 곳에서 만나뵙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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